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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유령 091025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10월 25일 2시. 샤롯데 씨어터
윤영석(팬텀), 최현주(크리스틴), 정상윤(라울), 윤이나(카를로타)


1. 최현주 크리스틴 닥찬양. 무척 강인하고 아름다운 크리스틴, 최대의 설득력을 부여한다. 엄청난 실력파라서 일단 노래를 무척 잘 부르고... 여러 버전 OST를 들어봤지만, Think of me가 그렇게 어여쁘게 들린 건 처음이었다. 특히 Wishing you were somehow here again이 엄청나게 좋았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그렇게까지 곧고, 순수하고, 강력하고, 처연하게 들릴 수 있다니. 원래 그 곡에 대해서는 별 감정이 없었는데 이번에 한방에 반해버렸다. 최현주 크리스틴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노래에 넣는 감정이나 연기, 표현이 무척 탁월하다. 이 크리스틴은 이리저리 흔들리고 의존하고 도망치다가 선택을 강요당하는 크리스틴이 아니라, 자신의 갈등을 구성하는 두 남자의 축을 두고 능동적으로 휘두르고, 변화를 만들어내고, 거리낌없이 슬퍼하고 곤궁에 파묻히지만 또 거리낌없이 삶을 선택하고 그 선택을 지켜나가려는 크리스틴이다. 아, 예쁘다. 이런 히로인을 지켜보노라면 행복해진다.

2. 샤롯데 씨어터는 생각보다 작았다. 무대가 작아서, 한니발이나 마스커레이드 같은 걸 하니 정말로 무대가 꽉 꽉 들어차더라. 좌석이 좀 뒤였기 때문에 관람하기에는 편했다. 앞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겠지. 하지만 더 자유로운 무대 활용도 측면에서 아무래도 제한이 있었을 터라서 안타까웠다. 동선이 거의 위태로워보일 지경이었으니까. 음향은 나쁘지 않았지만 모니터나 볼륨조절이 좀 에라일 때가 있었고... 오케스트레이션은 생이었는데 전자악기는 MR 돌린 것 같았는데 이거 밸런스가 좀 망가진듯했다. 그래서 The Phantom of the Opera 같은 곡의 임팩트가 다소 반감. 하지만 기본적으로 생 오케스트라에, 다들 노래 실력이 무척 뛰어나서(라울 빼고), 귀는 즐거웠다.

3. 오페라의 유령 영화를 보고 한창 버닝하던 2004년에 비해, 지금 보니 시선이 달라진 것 같다. 예전에는 팬텀만 좋았고 크리스틴도 라울도 다 미웠는데, 지금은 크리스틴과 라울이 참 예쁘고 자랑스럽게 보인다. 아무래도 내가 나이가 든 것도 있고 최현주 크리스틴이 워낙 강해서인 것도 있겠지만, 분명 내 세계관과 비평적 프레임이 달라지고 발전되었기 때문일 테다. 어쨌거나 오페라의 유령 역시 <호두까기 인형>으로 대변되는 상상계의 연애와 상징계 진입담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보니 오페라의 유령의 상징적 구도는 정말 엄청나게 명확하고 깔끔하다. 크리스틴이 수동적 히로인으로 까이는 경우가 많지만 분명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크리스틴이 맞고, 팬텀과 라울은 두 세계에서 그녀의 갈등을 상징하는 하나의 장치다. 팬텀을 수식하는 '밤', '가면', '노래' 등은 어떻게 봐도 꿈과 상상계과 환상과 쾌락원칙을 나타낸다. 본래 상상계란 아름답지만은 않고 (그 안에서는 인지하지 못할지라도 꿈에서 깨서 돌이켜보거나 외부에서 들여다보면)'끔찍'한 것이고, 크리스틴에게 그것이 거절하기 어려운 매혹인 동시에 끔찍한 두려움으로 나타나는 것도 설득력이 있다. 또한 그게 현실원칙으로 들어올 경우 살인이라는 범죄가 됨으로써 금지와 위반을 수반한다는 것 역시 명쾌하다. 게다가 팬텀과 크리스틴의 '아버지'의 연관관계는 무척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여기에서 아버지와 단절하고 라울의 손을 잡고 탈출하는 크리스틴은 분명히 여성적 거세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오페라의 유령 히로인 크리스틴이 다른 유사 성장담의 히로인과 차별되는 특수한 점은, 굉장히 단호하게 자신의 환상을 거절하고 극복할 줄 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팬텀이라는 상상계의 아름다움과 슬픔 역시 더 처연하게 효과적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단순히 상징계의 질서에 이끌려 수동적으로 상처받고, 도망치고, 곧 망각하는 게 아니다. 크리스틴의 반성은 무척 치열하기 때문에, 그녀는 팬텀을 저버린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울이 표상하는 '삶'을 자신이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선택하고 싶다는 것을 분명히 선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녀가 부르는 All i ask of you가 아름다운 것 역시 그래서다. 크리스틴이 라울을 선택하고 미래를 약속하는 것은 자신이 유년과 결별하겠다는 단호한 결의에서 비롯된다.
그렇다고 단순히 성장 단계에서 불완전했던 과거의 공포와 절연하는 것도 아니다. 크리스틴은 팬텀이라는 자신의 상상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애처로운지 알고 있고, 또 연민하고 끌어안을 수 있는 힘이 있는 여자다. 그래서 크리스틴은 팬텀을 가장 잘 헤아리고 이해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존재가 된다. 크리스틴의 여성적 힘이 가장 폭발적으로 보이는 부분은 역시 point of no return. 팬텀은 그 '연극'을 크리스틴의 현실의 층위를 혼란시키기 위해 끌고 들어오지만, 크리스틴은 그것이 연극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이 연극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고 있고, 그 목적을 그대로 수행할 줄 아는 의연함을 발산하면서도, 동시에 그 연극 내에서 팬텀에게 손을 내밀고 팬텀이 만든 프레임 내에서의 자신의 배역에 진심으로 파묻힐 수도 있는 여성적인 수용력을 보여준다. 게다가 point of no return의 섹슈얼한 코드는 분명 상징적이다. 육욕과 유혹이 도사리는 이 무대에서 크리스틴은 분명히 소녀에서 여성으로 진입하고 있다.
그 현명함과 용기로 말미암아, 그녀가 상상계에서 얻은 '노래'라는 가치를 그대로 유지하고 발전시키면서 상징계로 이행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갈등이 절정에 이르러 폭발하는 Down once more/ Track down this murderer에서 크리스틴은 몇 겹의 변화를 거치는데, 여기서 크리스틴이 팬텀에게 '증오'를 선언했다가 팬텀에게 다시 '불쌍한 사람, 얼마나 외로웠나요'라고 안아주는 것은 단순히 라울을 구조하고 빠져나가기 위한 거짓말이 아니라, 그녀가 부정을 거쳐 비로소 팬텀을 제대로 긍정할 수 있게 되는 반성을 거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팬텀은 크리스틴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지 않고 보내주는 것이고, 거기서 얻은 결실을 끌어안고 미래로 나아가기에 두 사람은 그 길에서 또 다시 All I ask of you를 부를 수 있으며, '노래'는 상상계에서 실종되지 않고 삶으로 다시, 온전히, 또한 더욱 깊이 이어질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상상계에 존재하는 나름의 윤리, 여성적 윤리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영화판만 봤을 때는 몰랐는데 뮤지컬을 보니 엔딩이 영화와 다르다. 영화에서는(그리고 하도 오래 전에 봐서 기억이 잘 안나긴 하지만 아마도 가스통 르루 소설 원작에서도) 팬텀이 불을 질러 숨진다고 표현되지만, 뮤지컬에서는 맥 쥐리가 다시 찾아왔을 때 아무것도 남지 않고 가면만 하나 덩그라니 남아있다는 식으로 끝난다. 팬텀이 정말 환상을 가장하는 보통 인간일 뿐이었는지, 크리스틴과 극단 사람들의 환상에 남아있는 실체 없는 유령일 뿐이었는지는 모호하게 처리되는 것이다. 이편이 훨씬 정직한 방식이다. 썩 마음에 들었다.

4. 어쨌거나 팬텀이 상상계를 대변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몹시도 유아적이기 때문이다. 지하에 강을 만들고 나룻배를 이끌고 가면을 쓰고 아버지의 무덤가에 찾아가서 크리스틴을 유혹하고 또 그녀를 되찾는 방식은 연극의 배우로 몰입하게 만드는 거라니, 몹시 유희적이고 유아적이지 않은가. 어른에게는 그런 방식이 먹힐 리가 없다.

5. 그런데 오페라의 유령은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인 것 같다. 아무래도 소설 원작이라서, 소설에서는 가능했던 개연성이 뮤지컬에서는 완전히 탈구되어있다. 그 불완전한 부분을 노래로 채우고, 그 노래(성악)의 불완전한 부분은 다시 연기로 채우고, 연기의 불완전한 부분은 화려한 춤으로 채워버리는 식으로 능청능청 넘어가버린다. 카를로타가 두꺼비 소리를 내는 게 설명되지 않고 넘어가버린다는 것 같은 부분은 단적이지만, 그 외에도 인물들의 갈등 전개나 해소 과정도 무척 불완전하게 처리되어있다. 그렇겠거니 하면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지만... 어쨌거나, '여러 장르를 통합'하는 게 예술적인 실험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런 식으로 키취하고 별 무리 없이 이해되는 팝을 만들기 위한 방식이라면, 내게는 least favorite일 수밖에. 결국 노래든 춤이든 연기든 내러티브든 다 불만족스럽고, 그 경계가 파괴되면서 드러나는 숭고함의 미학이 없다면, 잡스러운 키취에 다름 아니다. 
이런 걸 뭐 대단한 사실이다고 새삼 선언할 것도 아니고, 내가 무슨 엘리트도 아니고 스놉도 아닌데 키취를 폄하할 생각도 아니다. 나는 정말로 키취를 그 자체로 즐기고, 좋아하고,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나는 JCS를 다섯 번이나 중복 관람한 팬질의 전적이 있다!!), 이 뮤지컬 역시 정말로 즐겁게 보았다. 다만 내가 불만인 건 키취가 키취로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R석 11만원은... -_- 뮤지컬이라는 게 대체 왜 수준 높고 교양 있는 예술로 취급되어야 하는가? 뭔가 기형적인 시스템이라니까.

6. 멋진 작품과 예쁜 크리스틴을 볼 수 있어서 즐겁고 행복했다. R양과 그 능력있는 후원자에게 감사감사합니다!

by 아밀 | 2009/10/27 17:16 | 공연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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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늘푸른 at 2009/10/27 18:53
오페라의 유령은 오늘까지 13번을 봤는데 전 그래서 최현주 크리스틴 나온날은 팬텀 오브 오페라가 아니라 크리스틴 오브 오페라.라고 부르죠.;
후기 잘 보고 갑니다.제가 오전 오후 공연을 다 본날 보셨네요.^^
Commented by 아밀 at 2009/12/16 01:54
늦은 댓글입니다 ^^; 음, 그럴 만했어요. 이 공연은 정말 주인공이 '크리스틴'이더군요. 멋진 배우를 발견했다는 기쁨 자체가 가장 컸던 것 같기도 해요!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Filia at 2009/10/27 19:03
나도 최현주씨 캐스팅의 오페라의 유령을 봤었는데, 이제까지의 크리스틴과는 차원이 다르단 느낌이었어.

역시 에미 로섬이 너무 멍청하게 배역을 소화한 탓일까. 에미 로섬의 크리스틴이 그저 인형이란 느낌이면, 최현주씨의 크리스틴은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려는 '젊은 여성'이란 느낌이었어.

어린 시절의 환상과 현실의 행복 둘 사이에서 갈등하는 면모가 보여서 무척 와닿는 크리스틴이었어.

팬 텀의 소유욕이 유아적이라는 데 동의... ㅋㅋ 크리스틴의 포옹 씬에서 팬텀이 허물어진 이유는 크리스틴이 자신이 볼 수 없는 넓이의 세상을 보는 존재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어. 팬텀은 아무리 봐도 어린 소녀의 상상속의 친구 같은 느낌이어서, 여인이 된 크리스틴에게는 필요없는 존재였던 듯하고 말야.

그런데 윤팬텀과 최크리스틴을 보다니 레전드 캐스팅으로 봤군.
2009 캐스팅 버전 CD가 나온다고 해서 기다리는 중 :3
Commented by 아밀 at 2009/12/16 01:57
한달 넘어서야 다는 댓글입니다 (__); 크리스틴 정말 호소력이 강했죠, 에미 로섬 정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으리만치 다른 크리스틴이었어요. 뭐 노래 자체도 think of me 같은 거 비교하면 이미 하늘과 땅... 크리스틴이 그 정도로 강해져서 아무래도 팬텀의 유아적인 면모가 더 대조적으로 보인 것 같기도 해요.
레전드 캐스팅이었죠! 캐스팅을 미리 확인할 수가 없어서 좀 답답했는데 운이 따라준 것 같아요. 음반 사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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